시가란
한국어로 지어 노래한 시 작품을 가리키는 말이며,
고전 시가에는 상고시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시가가 포함된다.
다른 민족의 문학사가 그러했듯이 한국의 고전시가도 음악과 함께 지어지고 향유되었으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음악과 분리되어 언어 자체가 지닌 음악성인 율격을 갖춤으로써
가창하는 시에서 읊는 시로 바뀌었고,
현대에 와서는 눈으로 보는 시로 변모했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에서 율격적 형식성이 구체화되었다.
본디 한국시가는 한 마디 (흔히 '음보'라 함)를 이루는 음절의 수효가 비교적 자유로우면서
한 줄이 네 마디로 구성되는 특성이 있다.
그러나 이른 시기의 상고시가는 한국어로 표기된 것이 아니어서
율격을 짐작하기 어렵다.
향가는
넉 줄, 여덟 줄, 열 줄 등으로 노래 전체를 이루는 행의 수효에는 규칙성이 있으나
각 행에 나타난 마디의 수효에 따른 율격은 분명치 않다.
고려가요는
한 행이 세마디로 된 것도 더러 보이지만
대부분의 작품은 율격적 규칙성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대의 시조나 가사에 이르러서는
두 마디씩 짝을 이루면서 한 행이 네 마디로 이루어지는 율격적 규칙성이 나타났다.
고전시가의 맨 처음은 입으로 노래하는 단순한 형태의 것으로 시작되었다.
한민족의 선조에 관련한 기록에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하늘에 제사하고는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는 내용이 많은 것은 최초의 시가가 단순한 형태의 구전문학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이 기록들은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 한민족의 특성임을 짐작하게 해 주는데,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오늘날에도 한국인들은 명절이나 잔치 또는 놀이에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데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다.
노래와 춤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여 즐기는 것은 한국인의 여술적 전통이라 할 만하다.
고전시가가 이처럼 입으로 노래하는 방식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고전시가와 구비문학의 관계가 매우 긴밀함을 보여준다.
실제로 기록문학이 나타난 맨 처음 시기에 해당하는 상고시대의 노래로서 노랫말이 전하는 작품인
<구지가>나 <공무도하가> 또는 <황조가>등이 노래로 지어지고 불렸던 것이며,
고전시가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하는 조선시대의 시조 또한 정해진 음악에 맞추어 짓고 노래하는 것을 주로 했다.
고전시가의 이러한 특징은
그 작품이나 장르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구비문학적인 시각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말해 준다.
고전시가의 노랫말이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난다든지,
지은이가 달리 적혀 있다든지,
비슷비슷한 유형의 작품이 많다든지 하는 등의 특징은
대체로 구비전승물로서의 시가가 지닐 수밖에 없었던 변이 또는 부정확성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또 기록에 제목만 보이고 노랫말은 전하지 않는 작품이 상당수에 달한다든가
지은이를 알지 못하는 작품이 많다는 점도
구비문학으로서의 성격을 보여 준다.
이런 점에서 고전시가는 구비문학인 민요와 매우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대에 따른 고전시가의 변모를 민요의 형식적 측면과 관련해서 살피고자 하는 연구동향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고전시가는 그 시대 시대마다 독특한 양식으로 변모하면서 전개되어 왔다.
상고시대의 노래는 대체로 민요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들어서면 '향가'라는 독특한 시가양식이 신라시대의 문학을 대표하고,
고려시대에는 '속요(俗謠)' 또는 '경기체가(景幾體歌)'가 새로이 등장하는가 하면,
조선시대에 오면 '악장(樂章)'과 '시조(時調)' 그리고 '가사(歌辭)'가 당대를 대표하는 시가 양식이 되었다.
이처럼 고전시가가 양식적으로 다양하게 변모를 거듭했던 사실은
한국문학사의 시대를 구분하는 것돠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고전시가의 문학사적 의의가 여기에 있다.
상고시대의 노래인
<구지가><공무도하가><황조가> 등은 대체로 민요로서 향유되었기에
그 독특한 형식이 있었다고 하기 어렵다.
짐작컨데 제의적인 목적이나 서정 표출을 위한 노래가 특별히 양식화되지는 않은 채로 향유되엇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식화된 고전시가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향가는 넉 줄, 여덟 줄, 열 줄 등으로 노래의 형식성을 갖추는 정형성을 지녔고,
향찰(鄕札)이라는 독특한 표기를 채택하여 문자로 기록되기까지 했다.
또 집단의 노래가 아닌 개인 서정시까지 창작 됨으로써 시가와 민요가 분리되는 문학사의 단계를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민요를 다듬어 세련된 음악에 맞추어 부르는
속요 양식이 널리 향유되었으며,
문인들이 만들어 낸 새로운 장르로 경기체가가 새로이 등장한다.
민요를
세련된 음악으로 새로이 다듬어서 노래했다는 점과
문인들이 새로운 장르로 경기체가를 만들어 낸 점 등은
사회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문학의 변화와 유지를 주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물론 이 시기에도 하층의 민중들은 여전히 민요 등의 창작과 전승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가문학의 양식화나 변화는 상층신분을 가진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시가만의 특성이 아니고 고려시대 문학 전반에 나타나는 주된 성격이다.
따라서 고려 시가는 고려시대 문학의 문학사적 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가 양식은 악장, 시조, 가사의 세가지이다.
이가운데 시조와 가사는
그 발생시기를 고려 후반으로 보지만 그것이 활발하게 창작되고 향유된 시기는 조선시대이다.
따라서 세 장르의 전개양상자체가 조선시대의 믄학사적 성격을 함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시조는 3장 45자 안팎의 짤막하면서도 균형을 갖춘 정형성을 지닌다.
따라서 시조는 간결하고 압축된 단형 양식이다.
그 반면에 가사는 두 마디씩 짝을 이루면서 길이는 제한 없이 길어질 수 있는 장형이라는 점에서 시조와는 변별된다. 이처럼 서로 다른 두 장르의 자질들이 당대의 문학적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시가문학의 주축을 이루었다.
반면 악장은 그 형식이 매우 다향해서
그 작품들 간에 일률적인 동질성이 있다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조선 건국 초기에 건국의 기쁨과 왕조의 번성을 송축하는 내용을 지니면서
궁중에서 연희되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질성을 가졌던 양식이다.
악장은 건국 초기가 지나 상황이 바뀌고 송축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더 이상 창작되지 않은 양식이기도 하다.
이는 그 양식성이 확고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의 시조나 악장이 상층의 음악과 함께 향유되었던 사실은
이 시대에도 시가문학의 변화와 양식성을 주도한 것이 상층신분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그 소재나 제재는 상층인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것이 대부분이고,
또 내용은 남을 타이르는 교훈적인 내용이 주류를 이룬다.
이러한 상층문학적 경향에 커다란 변화를 보인것이
조선후기로 지칭되는 17세기 이후이다.
이 시기에 시조와 가사가 파격적으로 장형화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그 내용도 상층 문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상의 외설스럽고 좀스러운 일까지 노래하는 등으로 소재나 제재가 다양해졌다.
45자 안팎의 짧은 형태를 깨뜨리면서 길어진
사설시조(辭說時調)가 활발하게 지어졌는가 하면,
가사는 길이가 매우 긴 기행가사, 역사가사 등이 활발하게 지어졌다.
또 입으로만 전하던 시조의 노랫말을 수록한 가집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조선후기의 사회 변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시가 문학의 담당층이 널리 확대되고 시가와 음악이 분리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 결과 가사는 20세기 이후에 사라지게 되었으며,
시조는 음악과 분리된 문학으로서 오늘날까지도 그 창작이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