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가는 신라시대에 생겨나 고려 때까지 이어진 노래로 현재 남아 전하는 것은 모두 25수인데 이중 14수는 《삼국유사》에 전하고 11수는 《균여전(均如傳)》에 전한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14수는 형식과 내용과 지은이가 다양한 데 비해 《균여전》에 전하는 11수는 균여대사 한사람이 지은 <보현시원가(普賢十願歌)> 한 편만이 실려있다. <보현시원가>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진 불교적인 노래로 11수 각각의 노래가 열 줄씩으로 지어졌다.
향가라는 명칭은 '우리 노래'라는 뜻으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이 노래를 가리켜 '사뇌가(詞腦歌)'라고도 적고 있어 향가라는 명칭 대신에 사뇌가라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사뇌가라는 말은 '새내[東川]' 즉 신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사뇌가라는 명칭은 열 줄짜리 향가 작품과 관련해서만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향가 중에서도 열 줄짜리 향가만을 사뇌가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남아 전하는 25수의 작품들은 향찰이라고 하는 독특한 표기방식으로 기록되었다. 향찰이란 우리 문자가 없던 시기에 우리말을 표기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표기방식이었는데 한자의 음(音)과 훈(訓)을 섞어 써서 표기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전하는 작품들이 향찰로 표기되어 있다고 해서 향찰로 표기되어야만 향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가 고려 때인 13세기에 완성된 점, 그리고 향가작품들 가운데는 문자로 지어졌다기 보다는 노래로 부른 민요적 성격이 강한 것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향가라는 양식은 노래로 창작되어 가창되고 전승되었으며, 나중에 그것을 기록하는 데 향찰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향가의 작자는 매우 다향하다. 《균여전》에 기록된 11수는 승려의 전기 속에 나오는 것이므로 차치하더라도, 《삼국유사》에 전하는 14수의 작자 가운데는 월명사 또는 충담사와 같은 불교 승려가 있는가 하면, 견우노옹같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도 있고 신충또는 융천사와 같이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상층 신분의 사람도 있는가 하면, 희명이나 광덕처럼 불교적 믿음이 깊은 신도도 있으며, 서동처럼 백제의 왕족도 있고 <풍요(風謠)>처럼 작자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가 하면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수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불교적인 내용이라 하더라도 기원을 담은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도솔가>처럼 산화공덕과 관계된 것이 있고, 또 죽은 누이를 위해 재(齋)를 올리며 그리워하는 서정적인 것이 있으며, 그런가 하면 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수도의 염원을 노래한 <원왕생가>같은 것이 있다. 따라서 불교적 성격의 노래라 하더라도 그 성격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 또 <모죽지랑가>나 <찬기파랑가>처럼 수준 높은 서정시가 있는가 하면, <서동요>와 같은 동요도 있고, <풍요>와 같은 노동요도 있는 등 내용적 성격이 매우다양하다.
따라서 향가의 양식적 성격을 살피기 위해서는 그 내용보다 형식성이 중시된다. 향가에는 한 작품을 이루는 행수에 따라 넉 줄짜리, 여덟 줄짜리, 열 줄짜리의 세가지 형식이 있는데, <서동요> <풍요> <헌화가> <도솔가>는 넉줄짜리이며, <처용가> <모죽지랑가>는 여덟 줄짜리이고, <혜성가> <찬기파랑가> <안민가> <원가> <우적가> <제망매가> <원왕생가> <도천수관음가> 그리고 <보현시원가> 11수는 모두 열 줄짜리이다.
이 중 가장 단순한 형태가 넉 줄짜리인데, 그 형식이 단순한 것처럶 내용도 매우 단순한 것이 특징이다. <서동요>는 선화공조와 결혼하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래하게 해서 소문을 퍼뜨릴 목적으로 지은 것이므로 동요의 성격이 분명하며, <풍요>는 흙을 나르면서 불렀다는 짧은 노동요이고, <도솔가>는 산화공덕을 바치면서 불렀다는 단순한 형태의 의식요다. 넉 줄짜리 향가 중 <헌화가>는 서정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 노래의 기록에 이어지는 <해가>와 관련되는 무가로 볼 수도 있다. 여덟 줄짜리는 넉 줄에 다시 넉 줄을 더한 모습을 보여 주는 형식으로서 <모죽지랑가>는 화랑을 찬양하고 추모한 노래이며, <처용가>는 고려 <처용가>와의 관계로 미루어 보건대 무가적 성격을 지닌 노래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남아 전하는 작품의 수효가 많지 앟다는 점과 두 적품의 성격이 서정과 무속으로 판이하다는 점에서 여덟 줄짜리는 열 줄 짜리와의 중간적 과도양식으로 볼 수 있다.
열 줄짜리는 여덟 줄짜리에 다시 두 줄이 추가되었다는 정도의 형식적 차이를 가지지만 시적인 성격은 두 줄이 덧붙여졌다는 정도의 차이를 훨씬 넘어설 정도로 판이하다. 특히 덧붙여진 두줄의 첫머리에 '아아'등의 감탄사가 오는 것을 양식화하여 시상의 정서적 고양과 전환을 보임으로써 시의 완결성을 추구하고 있어 구조적으로 단단한 양식성을 보여준다.
열 줄짜리 향가는 대체로 첫째-넷째 줄, 다섯째-여덟째 줄, 하홉째-열짜 줄의 세 부분으로 시상이 나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러한 세부분은 처음 두부분의 병렬 혹은 전개에 이어 마지막 두 구에서 고양과 전환을 보임으로써 시적 대상을 자신의 내면에 정서화한다는 점에서 서정적 구조의 완결성을 구현한다. 그런데 <찬기파랑가>는 첫째-다섯째 줄, 여섯째-여덟째 줄, 아홉째-열째 줄의 세부분으로 이루어짐으로써 다른 열 줄짜리 향가들과는 다소 색다른 변형을 보이면서도 전처적으로는 시상전개의 일반적 구조를 구현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열 줄짜리 향가 가운데서도 최고의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덕왕이 충담사를 만나 "내 들으니 스님이 지은 찬기파랑사뇌가는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한가?"하고 물은 것은 이 노래의 시적 우수성을 지칭한 말로 짐작된다.